크리스마스 이브로 들떠 있는 토요일 오후. 크리스마스행사로 산행을 쉬어야하는 아쉬움에 강화도로 차를 몰아본다.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 산성으로,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
정족산은 5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아우른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다. 둘레는 2.3㎞ 정도로, 성곽은 산정상부에서 남문쪽 해발 75m 정도의 능선까지 내려와 있다.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이 각각 제시되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의 치(雉)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으로 되어 있다.
성 안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절 주변에는 1259년(고종 46)에 궁궐을 지었다고 전하는 고려가궐(高麗假闕)터가 있는데, 1264년(원종 5)에 불사(佛事)가 설행되어 원종이 친히 행차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1660년(현종 1)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사고가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불렸는데, 이 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가 한양을 방어하는 외곽 기지로 중시되면서, 고려가궐터에는 정조 때 정족진(鼎足鎭)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설치되었다. 그 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이곳에서 두 나라 군사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남문 안에 자리한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는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