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내린 비로 깨끗한 하늘을 벗삼아 둘러 본 강화산성길
지척에 두고도 이제야 처음으로 오른다는 것이 조금은 무심했다는 생각으로 산행을 동문, 망한루에서 시작해 본다.
주택가 골목길을 조금 헤메기는 했지만 물어 물어 들머리를 잡고 오르기 시작한다.
관리가 부실한 곳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스스로 위안해 본다.
북문의 소나무 숲은 산림욕장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푸르고 상쾌하다.
서문에서 남장대로 오르기 길이 조금 경사가 급해 힘이 조금 들기는 하지만 남장대를 품고 있는 남산의 경치가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듯하다.
남문을 거쳐 다시 동문으로 원점회귀..
3시간여의 짧은 시간이지만 파란하늘과 산동무들의 배려에 행복한 시간...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곳과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 등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연무당(鍊武堂)은 원래 강화진무영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열무당(閱武堂)이라 했다. 현재 농협 강화군 지부가 들어서 있는 자리에서 이곳 서문의 너른 터로 연무당을 옮겨 온 것은 고종 7년(1870). 그로부터 6년 후인 1876년 2월 국방 강화 의지가 한껏 고조되었을 이곳 군사 훈련장에서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우리나라는 인천·부산·원산의 항구를 열되,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을 적용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6년의 압제를 받았으니, 서문의 연무당은 그 설움의 역사가 시작된 징표로 남아 있다. 사각형의 흰 대리석 앞면에는 '연무당 옛터'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